[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학익진은 어떤 전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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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학익진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입니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인 1545년 3월 8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4월 28일을 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기념일 중 위인들의 생일에서 따온 기념일은 5월 15일 세종대왕 탄신일과 4월 8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인데요. 하지만 5월 15일은 기념일 제정 취지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명의 위인을 기념하는 날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 유일합니다.

 

오늘은 4월 28일을 기념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학익진 전술과 그 전술이 사용된 한산도대첩을 포함한 3가지 해전의 간략한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1592 임진년

옥포해전 5.7

당포해전 5.29

한산도대첩 7.8

부산포해전 9.1

 

1597 정유년

명량대첩 9.16

 

1598 무술년

노량해전 11.19

 

※ 다음, 네이버 백과사전, 나무 위키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수정하겠습니다.

 

 

학익진은 어떤 전술일까?

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1592.7.8

 

1592년 4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수륙병진계획(육지와 바다를 동시에 공격하며 나가는 것)으로 조선을 침략했으며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을 손에 넣었습니다.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던 조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제14대 임금인 선조는 평양성을 거쳐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옥포,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쳤습니다. 일본은 해전에서 거듭 패하자 병력을 집결해서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자카는 정예 병력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했으며 또 다른 장수 구키도 42척을 이끌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한 조선 수군은 1592년 7월 6일,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이끄는 48척의 배와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끄는 7척을 배를 노량에 집결시킵니다.

 

이순신은 7월 7일, 적함대가 견내량(見乃梁)에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지만 견내량 일대는 암초가 많고 지세가 좋지 않아 판옥선이 주력부대인 조선 수군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일본 수군이 궁지에 몰렸을 때 육지로 퇴각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고 판단해 견내량 밖으로 일본 수군을 유인해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낼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먼저 판옥선 5~6척의 소규모 미끼조를 투입하여 공격과 퇴각을 반복하였습니다. 일본 수군은 여려 차례의 패전을 보복하려는 듯 미끼를 물고 공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와키자카 함대는 퇴각하는 척하는 미끼조를 따라 한산도의 다도해 내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퇴각하던 미끼조는 기다리고 있던 이순신 함대와 합류했으며 함께 퇴각하며 작전을 실행합니다. 일본 수군이 작전 수역에 진입하자 퇴각하던 부대는 일시에 북을 울리며 배를 적군의 방향으로 돌리고 한산도 좌우 섬에 매복하고 있던 이억기와 원균의 함대와 함께 학익진을 형성해 일제히 포격을 가합니다.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 막강한 화력이 동원됐고 일본 수군은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47척이 격파됐으며 12척은 나포됩니다.

 

와키사카는 퇴각을 명령했고 처음부터 포위망을 벗어나 있던 14척은 포위당해서 공격받는 모습을 보고 퇴각하게 됩니다. 한산도로 도주한 왜병 400여 명은 후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큰 손실 없이 조선 수군의 대승으로 해전은 끝나게 됩니다. 일본은 육지를 통해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면서 식량 등의 군수품은 바닷길을 통해 공급받을 계획이었지만 한산도 대첩에서 크게 패하면서 바닷길이 막히게 됩니다.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은 한산도 대첩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이미 조선에 상륙해 있던 일본군에게도 위협을 주게 됩니다.

 

매우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해전으로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명량대첩

鳴梁大捷 

1597.9.16

 

1597년 정유재란은 1592년 임진왜란은 일으킨 일본이 전쟁 중단 협상을 벌이는 도중 다시 조선을 공격하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이순신은 부산에 있는 일본군 본거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조선 수군의 지휘관 자리에서 쫓겨나 일반 병사의 신분으로 백의종군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 천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조선 수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에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적을 막도록 했습니다.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여 육군의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남아있던 쓸만한 배는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 장군이 탈출시킨 12척과 일반 백성이 가져온 1척, 총 13척에 불과했습니다. 조선 수군 지휘관이 되자마자 상황을 꼼꼼하게 살펴본 이순신은 명량(울돌목: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의 좁은 물길과 조류를 이용하면 싸움에 유리하겠다고 판단하고 조선 수군의 근거지를 명량 근처로 옮기게 됩니다.

 

1597년 9월 16일 새벽, 일본 수군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 함대는 일자진을 형성해 모든 화력을 총동원해서 적을 향해 돌진합니다. 군사력은 일본 수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면서 조선 수군에게 유리해집니다. 많은 선박을 거느리고 있던 일본 수군은 방향이 바뀌어 흐르기 시작한 급류에 전투 진형이 무너지면서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아 31척이 파괴되고 8,000여 명의 군사가 피해를 입고 물러납니다.

 

10배 이상의 군사력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 이용한 지략과 후퇴하지 않고 돌진하는 불굴의 의지로 이겨냈으며 명량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하게 됩니다. 10만 명의 병력을 배에 실어서 서해를 지나 한양을 친다는 일본의 수륙병진계획은 명량해전의 패배로 수포로 돌아갑니다. 한양을 200여 리 앞둔 직산과 보은까지 진격한 일본군이 총퇴각을 결정한 것도 명량해전 패배 직후입니다.

 

노량해전

露梁海戰

1598.11.19

 

1597년 9월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하고 지상전에서도 점점 조선, 명나라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고전하던 일본군은 다음 해인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점차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 당한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 철수하기 위해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진린과 함께 9월 노량 근해에 집결합니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과 수륙합동작전을 통해 왜교에 주둔하고 있는 고니시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니시는 양쪽에서 위협을 받게 되자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진린에게 뇌물을 바쳐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게 합니다. 하지만 진린은 결국 그 사실을 이순신에게 알립니다.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정비해 왜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 등지의 시마쓰와 연락해서 남해, 부산에 있는 일본 수군의 도움을 받아 조선, 명나라 연합군을 협공하면서 일본으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함선들이 일제히 포격을 가해서 적선 50여 척을 격파합니다. 4시간여 동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끝에 200여 척 이상 격파된 일본 수군은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도주하던 150여 척 중 100여 척은 나포당했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50여 척의 도주하는 함대를 계속 추격했으며 계속된 전투 속에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게 됩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1597년 시작된 정유재란은 막을 내립니다.

 

 

학익진

鶴翼陣

 

학익진은 육군에서 사용하는 적을 포위하기 위한 공격 전술입니다.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에 최적화된 전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초에는 일렬횡대로 일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가 적군이 공격하면 중앙의 부대가 뒤로 물러나면서 좌우의 부대가 앞으로 달려 나가 적을 포위하는 형태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그 역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니발 바르카의 전술! 망치와 모루

안녕하세요! 여러분은 한니발 바르카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칸나이 전투가 떠오르는데요. 그는 어떤 지략으로 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바로 망치..

mamasajang.tistory.com

 

충무공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 당시 적용한 학익진은 해상전투에 적용된 최초 사례라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해전에서는 단순한 학익진보다는 초승달이나 물고기의 비늘을 벌린 형태라고 불리는 어린학익진(魚鱗鶴翼陣)이 사용됐습니다. 한산도 대첩의 학익진을 살펴보면,

학익진-전개-1-2
한산도 대첩 학익진전개

전개 1. 미끼조를 투입해 포위하기 좋은 지점으로 적군을 유인합니다. 학익진은 다수가 소수를 상대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한산도 대첩 당시의 조선 수군 55척 VS 일본 수군 73척은 학익진을 펼치기엔 역부족일 수 있지만 이순신은 매복 전략으로 학익진을 보완합니다.

 

전개 2. 작전 지역에 들어서면 미끼조와 합류한 이순신 함대는 급선회를 준비합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바닥이 U자형으로 속도는 느리지만 배의 회전(선회)이 빨랐으므로 학익진 대열을 갖추는데 유리했습니다. 반면 일본 수군의 왜선은 바닥이 V형으로 배의 속도는 빨랐지만 선회가 느렸습니다.

학익진-전개-3-4
한산도 대첩 학익진전개

전개 3. 배를 적군 방향으로 급선회하여 포격 진형을 갖추면서 뒤에 잠복해있던 원균과 이억기의 함대가 일본 수군을 둘러쌉니다. 왜선의 느린 선회에 최적화된 포위 전략으로 보입니다.

 

전개 4. 가운데 적군을 향해 집중 포격을 가합니다. 판옥선은 우현의 포를 사용하고 장전하는 동안 빠르게 방향을 바꿔 좌현의 포를 쏘는 포격에 특화된 선회력이 우수한 함선입니다. 또한 한산도 대첩 당시 2~3척으로 추정되는 거북선은 높은 방어력으로 적진을 향해 돌격해 탱커 역할을 담당해줍니다. 일본 수군은 빠른 속도로 접근해 백병전을 유도하는 함선이 주력이었으며 포격면에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사용하는 조선 수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학익진의 기본적인 진형은 단순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다수가 소수를 상대하기에 적합한 전술이며, 비슷한 전력일 경우 최전방의 탱커 역할이나 좌우 측면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최정예 전력이 있어야 가능한 전술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명확한 약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학익진-약점-필수조건
학익진의 약점과 필수조건

학익진은 적을 포위할 목적으로 대열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 두께가 약해집니다. 보통은 예비부대로 뒤를 받쳐주지만 한산도 대첩 당시는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이고 정면의 진형이 무너지면 흩어진 선박이 각개격파당하고 퇴각로가 사라지게 돼서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학익진의 성공 조건은 강한 모루(탱커)와 망치(포격)의 집중력입니다. 빠르게 접근해서 백병전을 유도하는 왜선은 최전방 거북선이 상대하고 포격이 우수한 판옥선은 진형을 갖춰 집중 포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전술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수군의 뛰어난 훈련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한산도 대첩, 명량 대첩, 노량 해전, 학익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봤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을 맞이해서 평소에 궁금했던 점을 찾아보면서 좋은 역사 공부를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필사즉생필생즉사

긴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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